지난 4일 오후 4시. 서울 마포구 신수동 서강대 메리홀로 예쁘장한 꼬마들이 하나 둘씩 모여들었다. “이리 와”, “언니 같이 가.” ‘까르르~’하는 아이들의 웃음 소리가 넓은 홀 안에 울려 퍼졌다. 피부가 조금 검거나 머리카락이 곱슬인 아이들도 눈에 띄었지만 다들 똑같이 한국어로 떠들며 웃었다. “자, 다들 단상 앞으로 모이세요”라는 지도교사의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는가 하면 불쑥 “선생님, 화장실 갔다 올래요”라며 어리광을 부리기도 했다. 무슨 얘기를 나누는지 끼리끼리 모여 배꼽을 잡고 웃는 아이도 있었다. 그야말로 왁자지껄. 보기만 해도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였다.

이날 모인 어린이들은 국내 최초의 다문화 소년소녀 합창단인 ‘레인보우코리아 합창단’ 단원들. 이날은 하루 앞으로 다가온 한국다문화센터 창립 1주년 기념행사에서 선보일 공연 연습을 위해 모인 참이었다.

단상 앞에 모여서도 제멋대로였던 아이들이지만 최재혁 지휘자가 지휘봉을 잡고 박혜경 반주자가 피아노 앞에 앉자 딴사람이 됐다. 마치 언제 떠들썩했느냐는 듯 아이들은 자세를 바로잡고 지휘자의 손 끝에 집중했다. 홀 안은 순식간에 무거운 침묵과 긴장감으로 채워졌다.

“푸른 푸른 푸른 산은~ 아름답~구나~ / 푸른 산 허리에~ 는 구름도 많다.”

앵두같은 입술에서 쏟아져 나와 하나로 어우러진 화음은 지켜보는 사람의 숨을 멎게 하는 듯했다. 말 그대로 ‘천사들의 합창’이었다.

레인보우합창단은 지난 7월10일 중국과 일본, 파라과이, 태국, 베트남, 파키스탄 등 다양한 나라에서 온 엄마나 아빠를 둔 다문화 가정 어린이 33명으로 창단됐다.

이제는 이곳저곳에서 섭외가 들어올 정도로 자리를 잡은 의젓한 합창단이지만, 처음 오디션을 볼 때에만 해도 아이들은 대부분 주눅 들어 있었다고 한다. 피부색과 얼굴 생김새가 조금 다르다고, 엄마가 다른 나라에서 왔다고, 한국어 발음이 어눌하다고 놀림 받았던 상처를 안은 아이들이기 때문이었다. 이현정 합창단장은 “아이들이 학교에서 ‘너희 나라로 가’, ‘중국인들은 더러워’, ‘엄마가 일본인이라면서? 우리나라한테 못되게 굴었잖아’라는 식의 말을 듣고 따돌림까지 당했던 경험을 서로 털어놓곤 한다”고 전했다. 이 단장은 “아이들이 처음에는 ‘혹시 내가 남들과 다른 튀는 소리를 내지 않을까’하는 걱정에 목소리도 제대로 못 냈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음악의 놀라운 힘 덕분일까. 합창단원으로 활동하면서 아이들은 눈에 띄게 자신감을 찾아갔다고 한다. 합창단의 일원으로 노래 부를 때엔 누가 누구와 다르고 같은 게 전혀 문제되지 않기 때문이다. 남들 앞에서 말 한 마디 하기를 꺼렸던 아이들이 어느새 친구들과 잘 어울리고 낯선 관객들 앞에서도 자신 있게 노래를 부를 수 있게 됐다.

낙해성(11), 새문(9) 자매의 아버지는 일본인이다. 활달하고 ‘왈가닥’ 기질이 있는 동생 새문이와 달리 언니 해성이는 말수도 적고 좀처럼 남 앞에 나서지 않는 소극적인 아이였다고 한다. 하지만 동생이 레인보우 합창단에서 노래를 부르는 것을 몇 번 보자 ‘나도 하겠다’며 따라나섰다. 이들의 부모는 “새문이는 몰라도 해성이가 뭔가를 하겠다고 나설 줄은 몰랐다”며 놀라워했다.

레인보우코리아라는 이름에 걸맞게 아이들은 합창단 활동을 하면서 무지갯빛 꿈을 키워 나가고 있다. 특히 가수나 성악가, 음악교사가 되겠다는 아이들이 많다. 연습 때마다 충남 천안시에서 할머니 손을 잡고 찾아오는 최다희(9)양의 꿈은 가수다. 파라과이 출신의 엄마가 화장품 회사를 다니며 활발하게 일하는 것을 닮았는지 최양의 열정도 대단하다. 연습장이 아무리 멀어도 꼭 참석하고 있다.

또 다른 단원인 이승연(9)양은 다른 꿈을 갖고 있다. 미스필리핀 출신의 엄마처럼 노래도 잘하고 예쁘게 되고 싶어 한다.

일본에서 온 엄마를 둔 문은혜(10)양의 장래 희망은 피아노교사다. 합창단에 들어와 활동하면서 피아노를 치는 선생님의 모습에 반해 버렸다. 문양은 “엄마는 일본인이고 아빠는 한국인이에요”라면서도 자신이 한국인인지 일본인인지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못했다. 2년 정도 일본의 외할머니 댁에서 살았다는 문양은 “친구들이 가끔 말을 좀 이상하게 한다고, 어려운 말을 잘 못 알아듣는다고 놀려요”라며 눈물을 글썽였다. 그러자 옆에 있던 다른 일본인 다문화가정에서 태어난 김은아(10)양은 일본어를 구사하면서 “저는요 일본어도 잘하고 한국어도 잘해요. 나중에 통역사가 돼서 공항에서 일할 거예요”라고 포부를 밝혔다.

이제 아이들에게 합창단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가장 소중한 존재가 됐다. 엄마가 중국동포 출신인 이지민(10), 지은(8) 자매는 학교에서 친구들에게 ‘더럽다’며 놀림을 받기도 했다지만 합창단 활동만큼은 누구보다도 적극적이다. “숙제 안 하면 합창단 안 보낸다”는 엄마의 말에 숙제를 뚝딱 해치울 정도다. 지은양은 여러 곡의 가사를 외우고 화음을 넣으며 율동까지 하는 게 쉽지만은 않은지 “노래가 너무 어렵다”며 쑥스러운 듯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합창단 연습에는 빠지는 일이 없다. 얼마 전에는 신종 인플루엔자A(H1N1) 유사증상을 보였던 지은양이 엄마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몰래 집을 나와 연습실행 버스에 올랐다가 잠이 드는 바람에 한바탕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가수 인순이와 함께 ‘거위의 꿈’을 부르기도 했던 레인보우코리아 합창단은 이제 스스로뿐 아니라 어른들까지 노래로 치유하고 있다. 지난 11월 국립극장에서 대공연을 펼치고 난 뒤로는 ‘공연을 보고 감동받았다’는 관객들의 반응도 이어지고 있다. 합창단에 아이를 보낸 부모들은 이구동성으로 “밖에만 나가면 자신감 없어 했던 우리 아이가 다른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다니 너무 놀랍다”며 감격해하고 있다.

레인보우코리아 합창단은…

사단법인 한국다문화센터(공동대표 보선스님·김의정 명원문화재단 이사장)는 2008년 12월5일 ‘모든 사람들이 어우러져 살아가는 열린 대한민국’이라는 기치를 걸고 출범했다. 이제 창립 1주년을 갓 넘긴 신생 단체다.

지난 7월 창단한 ‘레인보우코리아 합창단’은 한국다문화센터의 주요 사업 중 하나다. 아직 창단한 지 반년도 안 지났지만 합창단은 지난 9월부터 매주 3일씩 서울 관악구 봉천동 명락사에서 한 번에 네댓 시간씩 연습을 해 왔다. 이 덕분에 짧은 시간에 무대에 오를 정도의 실력을 기를 수 있었다. 지난 10월21일 ‘경찰의 날’ 기념행사를 시작으로 11월1일에는 국립극장에서 열린 ‘드림하모니 합창제’에서 대중 앞에 섰다. 11월29일 유엔아동권리협약 채택 20주년 기념 유니세프 기금 마련 자선 콘서트에선 당당히 오프닝 무대를 장식했다. 지난 5일 열린 한국다문화센터 창립 1주년 공연에서는 최초로 메인 무대에 섰다. 합창단은 현재 초등학교 3학년부터 중학교 2학년에 걸친 다문화가정 자녀를 대상으로 2010년 신입 단원을 모집 중이다.

한국다문화센터는 합창단 외에도 다문화가정의 자녀와 대학생들을 연결하는 멘토링 사업을 통해 다문화가정 자녀의 학습을 돕고 각종 장학사업과 건강교실 등도 운영하고 있다. 특히 올초부터 8개월 동안 이뤄진 대학생 멘토링 사업에는 경기 남양주, 안산, 성남, 의정부, 수원 등에 거주하는 56개 가정과 61명의 대학생 멘토가 참가했다. 대학생 멘토들과 다문화가정의 멘티들은 자발적으로 실외 학습과 공연 관람, 놀이동산 소풍 등 다채로운 교육 및 문화활동을 벌였다.

지난 6월에는 국회다문화포럼이, 8월에는 다문화정책자문단이 발족했다. 센터 측은 이를 계기로 다문화가정에 대한 정책적, 제도적 지원책 마련에도 박차를 가할 계획이다.

박세영기자 go@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