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 자유롭고 정의로운 대한민국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

봄비가 내리던 지난 5일 오후 6시 서울 강남구 삼성동 서울 해비치 다문화가족 교육센터 체육관은 ‘국기에 대한 경례’를 외치는 아이들의 목소리로 가득 찼다. ‘아이러브 태권도 한국다문화센터’라는 글씨가 새겨진 도복 위에 태권도 초보자임을 알리는 흰색 띠를 허리에 졸라맨 16명의 아이들은 가슴에 손을 얹고 대형 태극기를 바라보며 비장한 표정을 지었다.

쭈뼛쭈뼛 눈치를 살피던 초등학교 6학년생 고모(12)군은 낭송이 끝나자 결국 “다음 시간에는 꼭 외워 오겠다”며 ‘사범님’에게 약속을 하기도 했다. 일본에서 태어나고 자란 고군은 지난해 5월 아버지의 모국인 한국에서 새 삶을 시작했다. 그런 고군에게 한국어는 태권도만큼이나 낯선 한국 문화다. 하지만 그 누구도 ‘쟤 엄마가 일본 사람이래’라는 호기심 어린 눈빛을 보내지 않았다. 비록 나이도, 키도 제각각이지만 외국인 엄마 혹은 아빠를 두었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엄마 아빠가 한국인이 아니라서, 한국어가 서툴고, 한국 문화에 익숙하지 않다는 이유로 차별의 시선을 느껴 온 아이들이지만 이날만큼은 자신감 넘치는 태도로 태권도 수업에 임했다. 오는 8일 승급 심사를 앞둔 아이들은 그동안 익혀 왔던 품새를 되새기며 기합 소리에 맞춰 일사불란한 동작을 선보였다.

수업 첫날 출석을 부르는 태권도 교사 권순모(26)씨의 부름에 한마디도 하지 못하고 눈물을 보였던 황모(13)군은 이제 “얍!”이란 우렁찬 기합과 함께 상대방의 명치를 향해 힘껏 팔을 내지를 수 있는 ‘태권 소년’이 됐다.

1년 전 한국인 아버지를 따라 어머니의 나라 일본에서 한국으로 건너온 황군은 ‘중도입국자녀(결혼, 재혼 혹은 취업을 위해 한국에 온 부모를 따라 뒤늦게 중도 입국한 외국 태생 다문화가정 자녀)’로 한국어가 아직도 서툴다. 황군은 “한국에 처음 왔을 때는 한국말도 거의 못하고 친구를 사귀는 게 너무 힘들었다”면서도 “학교생활도 재미없고 한국이라는 나라도 싫었지만 태권도를 배우며 한국을 좋아하게 됐고 친구도 많이 생겼다”고 웃어 보였다.

서울 해비치 다문화가족 교육센터는 다문화가정 자녀들이 또래의 따돌림이나 괴롭힘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고 심신을 단련할 수 있도록 태권도 교실을 열고 있다. 센터는 지난해 12월 한국다문화센터와 현대차정몽구재단, 서울시 등 민관이 합동으로 설립한 다문화가정 지원 단체다. 아이러브태권도운동본부 등 9개 단체와 함께 시작한 ‘아이러브 태권도 프렌즈 가드 캠페인’의 첫 번째 주자인 20명의 다문화가정 자녀 1기 학생들은 앞으로 6개월간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 태권도 수업을 받을 예정이다.

센터 관계자는 “1기를 시작으로 ‘프렌즈 가드(친구 지킴이)’ 운동을 계속 이어 갈 예정”이라며 “이외에도 다문화가정 자녀, 특히 중도입국자녀들이 낯선 한국 생활에 안정적으로 적응하고 당당한 우리 사회의 일원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한국어 및 한국 문화 교육을 진행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센터는 태권도 수업 이외에도 현재 100여명의 다문화가정 자녀에게 한국어, 컴퓨터, 마술, 미술, 합창 수업 등을 제공하고 있다. 이주민을 위한 취업 교육과 자격증 교육도 함께 진행 중이다.

이곳에서 한국의 스포츠인 태권도를 배우기 시작한 아이들은 운동을 통해 자신감을 되찾고, 또래와는 조금 다른 자신의 성장 배경에 좀 더 당당한 태도를 가질 수 있다.

캐나다에서 태어났지만 한국인 엄마를 따라 한국에 왔다는 클로이 두옹(여·11)양도 “한국에서는 혼자 잠을 못 잘 만큼 겁이 많고 매사에 소극적이었는데 태권도를 배우고 난 뒤로 적극적인 모습을 되찾아 친구도 많이 사귀게 됐다”고 말했다. 클로이양의 손을 꼭 잡고 온 아버지 제임스 두옹(43)씨는 “딸이 태권도를 배우면서 캐나다에 돌아가고 싶다는 말을 더 이상 하지 않는다”며 “오히려 한국이 캐나다보다 더 좋다는 말을 할 정도”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