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 아버지와 필리핀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주리는 새봄이의 이 한마디에 발끈했다. 순간 교실도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태권도 빨간띠인 주리는 부들부들 떨며 주먹을 들어올렸다. 새봄이는 맞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꺄아악!” 하고 비명을 지르며 책상 위에 있던 필통을 주리한테 집어던졌다. 참다 못한 주리가 새봄이의 멱살을 와락 잡았다.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아이들이 달려들어 말렸다. 마침 담임선생님이 들어와 싸움은 끝났지만 다문화가정 출신인 주리는 이 사건으로 마음에 큰 상처를 받는다.
사소한 이유로 친구와 싸우다 “필리핀으로 가라!”는 소리를 들었다는 주리의 말에 주리의 아빠와 엄마는 신중하게 고민한다. 주리가 비록 얼굴은 좀 까맣지만 김치도 잘 먹고 태권도도 배우며 한국인처럼 잘살려고 노력하고 있는데, 웬 막말인가. 필리핀에서 대학까지 나온 엄마도 마음이 아파 눈물을 글썽였다. 그때 아빠가 뭔가 생각인 난 듯 말했다.
“아 참, 내가 며칠 전에 기사를 하나 봤는데, 다문화가정 아이들만 모아서 만든 레인보우 합창단이 있대. 우리 주리가 거기에 다니면 어떨까?”
일곱 색깔이 조화를 이룬다는 레인보우 합창단이라는 아빠의 말에 귀가 솔깃해진 엄마는 주리를 설득해 서울 지하철 2호선 낙성대역 근처에 있는 합창단을 찾아가 오디션을 보게 한다. 다문화가정 아이들끼리만 모인다는 걸 꺼림칙하게 생각하는 주리는 성의 없게 오디션에 응했다가 엄마한테 혼이 난 후 재오디션을 통해 합창단 단원이 된다.
때마침 좋은 일도 생겼다. 아빠가 업무차 필리핀으로 출장을 가게 돼 주리와 엄마도 함께 가기로 한 것. 반 아이들에게 자랑거리도 됐다.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이모 외삼촌 등 필리핀에 사는 친척들은 주리 피부가 하얗다고 칭찬하며 매우 반갑게 맞아주었다.
새롬이가 “필리핀으로 가라!”고 했을 때는 ‘필리핀’이라는 말이 한없이 부끄럽고 싫었지만 막상 가보니 그곳도 한국과 별반 다를 게 없는 곳이었다. 사람들은 느긋하고 친절하며 자연은 아름다웠다. 필리핀 토속어인 필리피노어는 물론 영어, 한국어 등 3개국어를 능숙하게 하는 엄마가 존경스러웠다. 더욱이 아빠와 엄마가 처음으로 만나 사랑을 나눈 곳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필리핀이 소중하게 느껴졌다. 외할아버지는 나중에 한국에 가면 멋진 곳을 안내 좀 해달라고 주리에게 부탁했다.
◇2009년 7월 한국다문화센터가 국내 최초로 다문화가정 어린이들로 창단한 ‘레인보우 합창단’. 단원은 오디션을 통해 선발하고 유니세프 기금 마련 자선 콘서트 등 각종 초청공연은 물론 지난해 G20 정상회의 특별만찬장에서도 공연을 펼쳐 세계 정상들에게 큰 감동과 기쁨을 주었다.
필리핀에 다녀온 후 주리는 한층 성숙해졌다. 영어공부를 열심히 하겠다고 스스로 다짐하고, 툭하면 싸우던 새롬이하고도 화해한다. 하지만 사건사고도 많았다. 자존심 센 주리는 처음엔 합창단 단원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지만 우여곡절 끝에 독창을 맡아 열심히 연습해 마침내 구민회관에서 열리는 국제인의 날 공연무대에 오른다.
주리는 “난 난 꿈이 있었죠/ 버려지고 찢겨 남루하여도/ 내 가슴 깊숙이 보물과 같이 간직했던 꿈/ 혹 때론 누군가가 뜻 모를 비웃음// 내 등 뒤에 흘릴 때도 난 참아야 했죠/ 참을 수 있었죠 그날을 위해…”로 시작하는 ‘거위의 꿈’을 솔로로 불러 앙코르 요청까지 받았다. 객석에 앉은 아빠 엄마는 물론 담임선생님과 반 아이들도 모두 “멋있었다”며 축하해 주었다.
이 책은 다문화가정 친구들이 모인 레인보우 합창단에 들어가 아픔을 극복하고 자신감을 얻는 이야기를 통해 아이들에게 ‘다름’은 ‘틀림’이 아니라 ‘차이’일 뿐이라는 것을 일깨워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