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가와사키 시에 사는 외국인들은 참정권은 없지만 ‘외국인 시민 대표자회의’를 통해 시 행정에 간접적으로 참여한다. 내국인과 외국인이 자유롭게 참여하는 대표자회의는 지역사회를 통합하는 역할도 한다. 사진 제공 가와사키 시
日“외국인도 우리 시민” 市정책 수립에 참여시켜
지난해 12월 14일 일본 가나가와 현 가와사키 시 다카쓰시민회관. 매서운 바람에 겨울비까지 내리는 악천후를 뚫고 시민 120여 명이 시민회관에 모였다. 바로 이날 열리는 외국인 시민 대표자회의 ‘오픈회의’에 참석한 시민들이다. 이들은 외국인 시민 대표자 25명과 함께 ‘교육과 다문화 이해’, ‘의료와 공생생활’ 등의 주제를 놓고 3시간 가까이 열띤 토론을 벌였다.
회의 중에는 “병원과 약국에 다언어 번역기가 있으면 좋겠다”, “일본어의 미묘한 표현을 데이터베이스(DB)로 구축하는 것이 필요하다” 등 다양한 아이디어가 쏟아졌다. 외국인 시민 대표자들은 이들의 건의내용을 가와사키 시에 전달하기로 했다. 외국인 대표들이 다문화 관련 정책을 마련해 시에 직접 건의하는 것은 일본에서도 가와사키 시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제도다.
○ 이주자에서 행정 파트너로
가와사키 시는 도쿄에서 전철로 약 15분 거리에 있다. 도쿄 만 연안의 대표적인 공업지역으로 인구는 130만 명이 넘는다. 외국인도 많아 2008년 말 현재 118개국 3만2000여 명의 외국인이 가와사키 시에 살고 있다. 경기 안산시에 58개국 출신의 외국인들이 사는 것과 비교하면 2배가 넘는 규모다. 이곳에는 특히 9000명 안팎의 한국인이 살아 우리에게도 친숙한 곳 가운데 하나다.
이 같은 배경 때문에 가와사키 시는 일본의 다문화 정책을 주도하고 있다. 1996년 가와사키 시와 시의회는 외국인 시민들을 행정에 참여시키는 방안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이전까지 정책 수혜자였던 외국인을 정책 조언자로 바꾸는 시도였다. 이 과정에서 ‘외국인 주민’이라는 단어가 처음으로 사용됐다. 가와사키 시의 다카무라 겐지 시민옴부즈맨 사무국 주간은 “외국인 주민은 외국 국적을 가진 시민뿐 아니라 결혼이민자 등 외국문화를 배경으로 하는 사람들을 포함한다”며 “외국인 주민은 이들이 지역사회에서 얼마나 중요한 위치에 있는지 나타내는 표현”이라고 지적했다.
같은 해 10월 외국인 시민 대표자회의 조례가 제정됐다. 조례는 대표자회의에 대해 “외국인 시민에게 자신과 관련된 문제를 조사 심의할 기회를 보장하기 위한 것”이라고 명시해 놓았다. 또 “외국인 시민의 시정 참여를 추진해 서로 이해하고 함께 사는 지역사회를 형성하는 것이 목적”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대표자회의가 정식 입법권을 갖지는 않지만 구성 절차나 기준은 의회 못지않다. 우선 가와사키 시에 1년 이상 합법적으로 살고 있는 외국인 가운데 신청을 받고 별도로 구성된 선출위원회의 전형을 거친다. 대표자가 특정 국가 출신으로만 구성되는 것은 아니다. 출신국가별 인구 비례에 맞춰 선정된다. 2년 임기의 대표자들은 매년 4회(8일) 정기회의를 열고 연말에는 일반인을 대상으로 보고회 형식의 ‘오픈회의’를 개최한다.
○ 외국인 눈높이 정책 실현
대표자회의의 가장 큰 장점은 외국인들이 느낀 지역사회의 문제점을 가장 빨리 시에 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곧바로 가와사키 시의 다문화 정책에 반영됐다. 자칫 외국인들의 ‘불만 제기’에 그칠 수 있었던 대표자회의가 13년간 ‘순항’하는 이유다.
1년 동안 진행된 정기회의와 오픈회의를 통해 결정된 ‘대표자회의의 제언’은 가와사키 시에 전달된다. 시는 분야별로 담당 부서를 정해 추진 여부를 결정하고 진행 상황을 대표자회의에 보고한다. 지난해까지 대표자회의가 결정한 정책제언은 약 30건. 외국인 출입국 관리행정의 간소화와 유학생 생활지원, 외국인 자녀 학습지원 등이다. 이 가운데 외국인 거주지원을 명문화한 주택기본조례 제정과 6개국 언어로 작성된 취학안내서 배포, 외국인 상담창구 개설 등이 실제 정책으로 이어졌다. 가와사키 시의 우에노 요코 인권·남녀실장은 “대표자회의는 모두 공개되고 회의 결과는 각국 언어로 번역돼 소식지와 홈페이지에 게재된다”고 말했다.
○ 다문화 ‘공생(共生)’ 외치는 자치단체들
다문화 관련 정책에 소극적인 일본 정부에 비해 지자체들은 적극적으로 외국인을 끌어안고 있다. 특히 외국인에 대해 지원의 대상을 넘어 지역사회의 당당한 구성원으로 인정하는 분위기가 확대되고 있다. 일본 다문화 정책에 ‘더불어 산다(공생)’는 표현이 항상 함께하는 이유다.
지자체 중에서도 가와사키 시처럼 외국인이 많이 살고 거주 역사가 오랜 지자체들이 주도하는 편이다. 일본계 브라질인이 가장 많이 사는 하마마쓰 시는 2001년 세계도시화비전을 마련하고 다문화 공생을 주요 정책으로 정했다. 재일교포가 많은 오사카 시는 1998년 외국적 주민 시책지침을 수립했고 아이치 현과 히로시마 시도 다문화공생 지역사회 만들기에 적극적이다.
양기호 성공회대 교수(일본학과)는 “일본의 중앙정부가 외국인 문제를 매우 신중하고 점진적으로 대응하는 반면 지자체의 프로그램은 매우 구체적이고 실용적”이라고 평가했다.
한국에도 일본 가와사키 시의 외국인 시민 대표자회의와 비슷한 모임이 있다. 2003년 출범한 부산 외국인 대표자회의가 바로 그것이다. 2005년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개최를 앞두고 부산시가 국제화 도시로 거듭나기 위해 구성했다.
외국인 대표자회의에는 1년 이상 부산에 살고 있는 외국인과 시 공무원 등이 참여하고 있다. 이들은 매년 두 차례 회의를 열어 부산에 살면서 느꼈던 문제점을 지적하고 개선을 건의한다.
건의 내용은 부산시 담당 부서와 산하 기관, 각 구청 등지로 전달되고 해당 기관은 처리 결과를 대표자회의에 통보한다. 대표자회의가 6년 동안 건의한 내용은 50여 건. 상위법에 어긋나지 않는 범위에서 대부분 실제 정책에 반영됐다. 부산지하철 내 영어표지판 설치와 승차권 자동발매기 영어안내방송 실시, 영문 버스노선표 설치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외국인과 관련 없어 보이는 환경과 교통 문제에 대한 건의도 활발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외국인을 위한 정책 건의 기구에 불과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아직 회의를 공개하거나 결정 내용을 공표하는 창구가 없기 때문이다. 반면 가와사키 시 외국인 시민 대표자회의는 모든 회의를 공개하고 결정 내용을 소식지나 인터넷으로 일반에 알리는 등 내·외국인을 아우르는 지역사회 통합 기능을 하고 있다.
그나마 부산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에서 외국인들의 행정 참여는 걸음마 단계다. 경기 안산시는 지난해 5월부터 거주 외국인 지원 민관협의체를 운영 중이고 화성시는 최근 외국인 주민 지원 시책위원회를 구성했다. 2007년 재한 외국인 처우 기본법이 제정되면서 조금씩 늘고 있지만 공식 기구를 운영 중인 지방자치단체는 아직 손에 꼽을 정도다.
게다가 외국인 대표자의 비율이 20∼30%에 불과하다. 또 주로 평일에 회의가 열리다 보니 외국인 근로자들이 참석하기 어렵다. 이 때문에 모임에 참석하는 외국인 대표자는 대부분 결혼이민자여서 다양한 의견 수렴이 어렵다. 안산시 외국인주민센터의 이정민 다자외무담당은 “진정한 다문화사회 발전을 위해 외국인들의 행정 참여는 필수적”이라며 “아직은 시작 단계지만 앞으로 외국인들의 참여를 늘려나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