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 이재만 our10002@hanmail.net

“아지벡코바 굴바르친!”

사회자가 으뜸상을 받을 사람의 이름을 부르자,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졌다. 아지벡코바 굴바르친씨(33·여)는 10월 9일 563돌 한글날을 맞아 전북대 언어교육원이 개최한 ‘외국인글쓰기한마당’에서 최고상인 으뜸상을 수상한 우리말의 ‘달인’이다.

이주여성, 이주노동자, 유학생 등 231명의 참가자를 제치고 1등을 차지한 그녀는 한국어를 빨리 배운 덕택에 한국 문화에 빨리 적응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그녀의 '한국생활 적응 이야기'를 듣기 위해 그녀가 살고 있는 전북 진안군 부귀면을 찾았다.

“애를 위해서라도 말을 배워야겠더라고요”
그녀의 고향은 중앙아시아에 있는 키르키즈스탄. 한국과 경제 교류가 활발해지고 드라마 등 한류문화가 번지면서 한국어 수요가 빠르게 늘고 있는 곳이다. 굴바르친씨는 1999년 남편 김병열씨(40)를 만나 한국에 둥지를 틀었다.

여느 결혼 이주여성처럼 그녀도 한국생활 초기엔 언어의 장벽으로 많은 고생을 했다고 한다. 키르키즈스탄에서 한국생활에 대비해 미리 한국어 공부를 했지만 '가나다라'를 겨우 읽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한국에 온지 1년 만에 그녀는 우리말을 깨쳤다.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 어느 방송을 보게 되었어요. 어떤 이주여성이 아이가 학교 다니는데도 서로 말이 안 통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아이가 심장병 걸렸는데도 모르고 있었다더군요. 충격을 받아서 저는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 한국어를 유창하게 배워야겠다고 마음먹었어요.”

독학 1년 만에 한국어 숙달
그녀의 당찬 다짐과는 달리 학습환경은 좋지 않았다. 당시 군단위 지역에선 현재 진안군 다문화가족지원센터에서 제공하는 ‘한국어 강습’ 같은 체계적인 한국어 강습 지원 또한 꿈도 꾸기 어려웠다. 남편마저 일을 나가면 거의 혼자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그녀는 환경을 탓하기보단 ‘독학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생각을 가졌다고 한다. 그녀는 용기를 내 전주시내 서점에 들려 한국어 문법책을 몽땅 사왔다. 그렇게 그녀는 1년간의 독한 한국어 공부를 시작했다.

“처음 시작 할 때는 슬슬 잘 풀리더니, 결국 문법이 발목을 잡더라고요. 표준어로 배웠기 때문에 사투리가 조금 어려웠습니다. 그리고 한국어보다 고사성어 등 한자가 어려웠던 기억이 납니다.”

모르는 내용은 남편에게 물어가며 문법책을 보는 회수를 늘려나갔다. 특히 남편은 발음 공부에 큰 도움이 됐다.

“남편이 저녁에 일 끝나고 와서  식사 하면서 제가  잘못 발음하면 많이 고쳐주고, 둘이 오랫동안 대화를 했습니다. 참 고마웠어요.”

그렇게 1년이 흘렀다. 그녀는 “한국어 공부를 시작한지 1년 뒤에는 자유로운 의사소통이 가능했다”며 “언어를 통해 한국문화를 알아간다는 생각에 힘든 공부도 견딜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2년 전 어린이 집에 모여 자모회를 하고 있는 굴바르친씨. 그녀는 3년 동안 자모회 회장직을 맡았다.

그녀를 가족같이 곁에서 지켜본 부귀면 부녀회장은 “처음 시집왔을 땐 정말 말이 안통해서 걱정도 많이 했는데. 몰라보게 우리말을 잘해서 깜짝 놀랐었다”라고 말했다.

결국 그녀는 자신이 계획한 1년 안에 이미 독학한다는 그녀 자신과 첫 번째로 맺은 약속을 지켜낸 것이다. 그리고 첫째 아이를 낳았다.

다재다능 열혈주부, 가족과 함께 방송에 출연
그녀는 틈틈이 러시아어 번역일을 하면서 남편을 도왔다. 한국말 배우기보다 더 힘들었던 것은 애 키우기였다. 첫째가 우유를 떼고, 유치원에 입학 할 때까지 시간이 어떻게 흐른 지 모를 정도로 바쁘게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막내 대현이를 유치원에 보내고서야 한 숨을 돌릴 수 있었다.

그녀가 남편의 권유로 배구단 활동에 참여하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였다. 첫 대외활동이기도 했다. 그녀의 배구실력은 수준급이었다. 배구단에서 나아가 자모단 활동을 하며 3년간 자모회 회장도 했다.

“외국인 며느리들이 한 팀이 되어 생활체육회 분들과 배구를 하면서 서로 단합하게 됐고, 고민도 상담하고, 아이 키우는 노하우도 공유하고, 무엇보다 공감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음에 감사해요.”

2006년 진안 외국인 며느리 배구단 창립식 전에 찍은 모습.

2006년엔 방송에도 출연했다. 다문화가족 이야기를 다루는 KBS ‘러브인 인 아시아’ 프로그램에 가족과 함께 출연하게 된 것. 이주여성으로 꿋꿋하게 살아가는 그녀의 모습이 전국으로 전파를 타고 나갔다. 이후 진안 관내에선 ‘굴바르친 모르면 간첩’일 정도로 유명세를 탔다고 한다.

덕택에 대학교 등의 각종 행사, 포럼에서 '다문화 우수정착 사례'란 주제로 강의하기도 했다. 그녀는 이주여성에게 문화적 차이라는 근본적인 어려움이 있지만, 한국어를 빨리 배우면 배울수록 문화적 차이를 줄이는데 큰 도움이 된다고 강조했다. 2008년엔 한국어능력시험 고급과정에 합격했다.

굴바르친 가족이 2006년 KBS '러브인 인 아시아' 출연 모습.

진안보건소에서 통역요원으로 이주여성 도와
그녀는 지난 7월부터 진안군 보건소에 취직해 통역요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주여성을 위해 산부인과와 예방 접종실에서 영어를 번역하는 일이 주요 업무다.

그동안 이주 여성들은 보건소에서 진료를 받더라도, 의사소통이 잘 안 돼 많은 어려움을  겪어왔다. 특히 예방접종 방법을 몰라 시기를 놓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녀는 “보건소 내에서뿐만 아니라 이주 여성들의 가정을 방문하면서 그녀들이 겪고 있는 문화 차이, 시댁과의 갈등까지 상담할 수 있어서 보람이 크다”라고 말했다. 

또한 요즘은 한자공부도 시작해 그녀의 시간표는 일하는 시간과 공부하는 시간이 대부분일 정도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다문화 우수정착 사례’라는 내용으로 강의하고 있는 굴바르친씨.

그녀의 꿈은 작가라고 한다. 고향에서도 고등학교 신문사 편집장으로 활동하면서 글쓰기에 남다른 관심을 가졌다고 한다. 당시 국어선생님은 굴바르친씨에게 “유명한 작가가 될 거라 확신한다”며 응원도 해줬다고 한다. 꿈을 이루기 위해 바쁜 가운데 언제나 최선을 다하는 굴바르친씨.

“요즘은 우리 지역 진안신문에서도 각국 대표 한 명씩 뽑아서 ‘어울림 기자단’을 만들었고, 얼마 전부터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저는 키르기스스탄 대표로 아마 다음 주부터 기사를 낼 겁니다. 앞으로 진안 신문에도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한국인 색시로, 세 아이의 엄마로,  보건소 통역요원으로 전라북도 진안군에서 제2의 장밋빛 인생을 펼쳐 나가고 있다. 훗날 어느 서점에서 그녀의 이름을 볼 수 있지 않을까, 또 어떤 이야기가 쓰여 있을까 기대해본다.